Wednesday 21 Novembe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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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 15 days ago

판잣집에서 생을 마감한 고위 공무원

1925년 7월 29일, 개복동 영신 어학원에서 군산지역 청년단체 연합 연설대회가 열렸다. 개최 목적은 지역 문화 발전. 500여 명에 인원이 참가한 큰 행사인 만큼 정사복 경찰들은 연설회장 안팎을 삼엄하게 경계했다.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군산청년회 김황은 lt;우리의 설움 gt;이란 주제로 식민지 백성들의 서러움과 경성 수재민들의 참상을 논했다. 이에 경찰관이 중지를 요구했고 결국 해산을 명하였다. 격분한 청중들은 해산 이유가 뭐냐 며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여기저기에서 한숨과 탄식 소리가 들리는 등 장내는 살기가 가득했다.

이때 김용택이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단상에 올라 우리 처지로는 구(口)를 개(開) 하면 피 끓는 언론이 아니 나설 수 없다 고 외쳤다. 경찰에 연행되는 고초까지 겪으면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일제에 맞서 저항했던 김용택은 이후 중앙부처 관료가 된다.

대한민국 제2호 경제학 박사이자 미군정시절 재무부장(재무부 장관) 대리를 지낸 김용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제1공화국 시절, 사회부 차관 역임

김용택은 1907년 군산에서 무역업을 하는 김홍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홍두는 구복동(현 중앙로 2가)에서 천일상회를 운영하며 군산부 협의회 위원과 군산상공회의소 의원을 지냈다. 김용택의 부친은 군산 노동공제회 초대 회장, 신간회 군산지회장, 교육후원회장 등을 역임한 사회운동가이자 사업가로 지역에서 명망 높았던 인물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군산 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 보성중학교, 일본 명치 대학, 미국 미시간주 호프 대학을 거쳐 1937년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 무렵 북미 유학생총회 이사장과 총회장을 겸했던 김용택은 중국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1940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광복 후 대학 시절 가깝게 지내던 미국인 추천으로 재무부장 자리에 오른 그는 청렴성과 깔끔한 업무수행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제1공화국 시절인 1952년 2월 사회부 차관에 발탁된다.

김용택, 연기자가 된 딸 김혜자에게 열심히 해보라 격려

김용택은 국민 엄마 로 알려진 배우 김혜자의 부친이기도 하다. 최영의 lt;군산풍물기 gt;에 따르면 김용택은 17살에 두 살 연상의 규수와 결혼한다. 그는 두 딸을 낳은 후 22살 때 유학을 떠나 미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보냈다. 15년 후 1940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 해 김혜자를 낳았다.

김혜자는 1962년 KBS 1기 탤런트로 처음 연기자가 됐을 때 어머니와 언니들은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좋은 배우가 돼서 좋은 연기를 한다면 다른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좋아. 열심히 해봐라 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고 회상한 바 있다.

4번의 도전에도 국회 입성 실패

김용택은 1950년대 중반 군산으로 내려온다. 그는 중동 274번지에 자그만 기와집 한 채를 마련하고 서울과 군산을 오가며 활동한다. 당시 중동은 빈촌으로 군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동네였다.

고향으로 내려온 김용택은 4회(1958년, 1960년, 1963년, 1967년)에 걸쳐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지만, 정당공천을 받지 못하거나 본선에서 쓰디쓴 고배의 잔을 마셨다. 1963년 열린 제6대 총선 당시 김용택은 집권당인 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지만, 고형곤 제1야당 민정당 후보에게 303표 근소한 차로 낙선하면서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후 군산에는 지난 선거에서 아깝게 낙선한 김용택 박사가 탤런트 김혜자의 아버지 라는 소문이 났고, 김혜자 고향이 군산이다 , 김혜자가 군산에서 여고를 다녔다 등의 뜬소문이 사실처럼 나돌기도 했다.

강직했던 삶... 6평 판잣집에서 마감

김용택은 1967년 공화당을 탈당한다. 서울시 중구 회현동 집을 정리한 후 은평구 응암동에 판잣집을 마련한다. 아파트를 사드리겠다 는 김혜자의 설득에도 김용택은 이만한 집도 없는 친구가 많다. 대봉의 큰 뜻을 너희가 어찌 알겠느냐? 며 한사코 거절한다.

혼란기를 틈타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고관댁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던 미군정기와 자유당 시절. 국방부 차관보, 사회부 차관 등을 거친 김용택은 마음만 먹으면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1984년 7월 16일 철거를 앞둔 여섯 평짜리 판잣집에서 영욕으로 얼룩진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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