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16 Decembe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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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 29 days ago

대한민국 최초의 쌍둥이 빌딩에서 벌어진 일들


광화문 광장의 역사지리적 변화

정도전의 집 서쪽으로는 삼청동천이 흐르고, 그 물길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는 조선시대 내내 호조·한성부·이조가 나란히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경성법학전문학교·지질조사소·경관강습소 등으로 바뀌었고 현재 이곳에 KT빌딩, 미대사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이 가운데 경성법학전문학교는 본래 한말 한성법학원 이란 명칭의 법관양성소로 설립된 것으로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물론 이 학교는 교사의 노후화로 1938년 현 청량리중학교 자리로 신축·이전했다. 해방 후 미군정청에서 작성한 지도(1946, Seoul city plans)에 그 지역이 Law school 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일제강점기 내내 경성법학전문학교 관련시설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위 그림참조).

한편 한성부는 경술국치 후 경성부로 개칭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기도청 산하의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청사의 위치도 현 신세계백화점 위치에 있던 당시 경성이사청 건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광화문에서 사라졌다.

그 후 이 건물들은 해방의 격동기를 보내고 6.25전쟁 때 멸실되어 공터로 남아 있었다. 목원대 김정동 교수에 의하면 당시 이곳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참관한 연날리기 대회가 열렸는데 흙바닥 위에 가마니를 깔고 행사를 치렀다 고 하니, 전후 이 일대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이 일대에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 2월이다. 그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주한미대사관이다. 전쟁 직후 정부청사로 사용했던 옛 총독부건물은 내부가 불타고 파손되어 당장 활용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1954년 새 정부청사 신축계획이 마련되었고, 그 위치가 바로 이 공터였다.

하지만 전후 재정상태가 어려워 결국 공사비는 대외원조자금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정부의 원조 500만 달러로 당시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 현 한미경제협력위원회, 현재 미국대사관) 건물을 신축하였는데, 321만 달러만 쓰고 돈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이 잉여금으로 같은 설계도에 근거해 현재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물도 건립했다. 그렇게 총 공사비 550만 달러로, 1961년 10월 1일 지하 없는 지상 8층의 건물이 들어섰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쌍둥이 건물이다.

군사정권인 제3공화국이 기획된 건물

한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쿠데타세력은 육사 5기와 8기를 주축으로 군사혁명위원회 라는 이름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킨 후 이틀 뒤 입법-사법-행정 등 3권을 모두 장악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이하 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꿨다.

그리고 쿠데타 직후 지휘부는 삼각지 육군본부에 잠시 머물다 최고회의 를 설립하면서 광화문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일 뿐 정부신청사(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가 완공되자 바로 이곳으로 옮긴다. 그리고 최고회의가 해체되는 1963년 12월까지 이곳에 있으며 박정희쿠데타세력의 이후 권력장악을 기획했다.

결국 우리나라 현대사에 있어서 최초의 군사정권이라 불리는 제3공화국이 이렇게 탄생된 것이며, 그 장소가 바로 이곳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물이다. 참고로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의 집무실은 북동쪽방향(경복궁 쪽)으로 끝 방이었으니 역사지리적으로 바로 이곳이 쿠데타세력의 수뇌부였던 곳이다.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최고회의는 해체되고, 이곳에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1989년까지 사용하였으니 우리나라 산업화 정책 역시 이곳에서 수립된 것이다.

이후에는 이곳을 문화공보부가 그 명칭을 문화체육부, 문화관광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으로 바꿔가며 2010년까지 사용하였으니, 2002년 월드컵의 총사령부 역시 바로 이곳이었던 셈이다. 참고로, 최고회의가 정권수립을 통해 그 사무실을 경복궁 중앙청으로 옮기면서 이곳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집무실은 그 후 이 건물을 사용하는 부처의 장관실로 사용되었다.

뉴라이트 홍보관으로의 변신

한편, 2006년 뉴라이트세력의 대표적 이론가인 이영훈 교수가 1948년 건국론 을 처음으로 제기하면서, 당시 한나라당에서 이를 받아 광복절을 건국절로 변경하는 법안을 제출하면서 건국 시기에 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권력을 장악한 한나라당 이명박 정권은 2008년 제63주년 광복절 및 대한민국 건국 60년 대통령 경축사 에서 이를 조직적으로 홍보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1948년 이후의 현대사박물관 설립을 제기함으로써 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된 것이 바로 지금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즉 일제감정기 속에서도 1919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수립한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끊고, 1948년 외세의 비호 아래 친일파들이 주도하여 수립한 1948년 정부 를 건국절로 승격시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정계와 학계뿐 아니라 다수 국민대중의 반발 속에 혼란을 거듭하다 결국 2017년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전면 백지화되었다. 현재 이곳 박물관 관장 역시 2017년 11월 기존 뉴라이트 역사관에 대하여 비판적인 역사학자 주진오 교수로 교체되었다.

북한에는 건국절 논쟁이 없는 이유

참고로 북은 김일성주석이 항일운동을 조직적으로 시작하기 위하여 중국 안도현에서 1932년 4월 25일 창립한 반일인민유격대 (항일유격대)를 그 뿌리로 보고 있다. 그리고 해방 후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으로 결국 통일정부를 갖지 못한 채 1948년 9월 9일 인민공화국정권이 수립된 날을 공화국 창건일 로 기념한다.

한편 1948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일을 건군절로 기념하고 있다. 이처럼 북은 특별히 건국일, 정부수립일을 따로 구분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일본과 싸우며 광복을 맞이했고, 바로 그 세력이 그대로 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에 특별히 논란이 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한은 독립운동세력과 정권수립세력이 동일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논란에 휩싸이고 있는 것이다. 하다 못해 북의 건군절 행사는 때에 따라 광복 후 정식으로 창군된 1948년 2월 8일을 기준으로 하기도 하고, 아니면 항일유격대를 창건한 1932년 4월 25일을 기준으로 하기도 한다.

어느 날의 행사를 더 크게 하느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1932년 4.25항일유격대 세력이 1948년 2.8조선인민군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쪽은 사정이 다르다. 일본군으로 활동하던 친일 세력이 국군의 주요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 웃긴 것은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우리의 국군이 창군된 날이 아니라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38선을 넘어 북진하게 된 바로 그날인 1950년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이다. 이는 노골적으로 말하면 북침기념일 에 불과한 것이다.

참고로, 이날 최초로 38선을 넘으며 아아, 감격의 38선 돌파 라는 글귀의 기념비를 세운 사람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며 독립군토벌에 앞장선 1군단장 김백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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