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18 Januar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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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ib.co.kr - 7 days ago

해학 섞어 그린 숙종 때 배경 정쟁·풍습


조선 숙종(1661~1720) 대는 자주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시대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맞는 과정이 극적이기 때문이다. 멀게는 김만중이 숙종 연간에 쓴 소설 ‘사씨남정기’가 있었다. 후실을 들였다 곤경에 처한 선비가 본부인 사씨를 다시 찾는 얘기다. 가깝게는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2013)가 기억난다.

천연덕스러운 입담을 자랑하는 소설가 성석제(59)가 여기에 장편 역사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를 보탰다. 주인공은 왕도, 중전도, 충신도 아니다. 한양에서 제일 잘나가는 기생방 주인인 할머니 덕에 놀고먹는 알건달에 파락호 ‘성형’이다. 작가는 우연히 왕과 의형제를 맺게 된 가상인물의 눈으로 정쟁의 제물이 됐던 여인들, 죽음 앞에서도 절개를 지킨 선비들의 삶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서울 노량진역 헌책방에서 시작된다. 소설 속 작가는 헌책방에서 조선시대 야사를 담은 ‘국역 연려실기술’ 전집을 산다. 이 전집 사이에 끼어있던 원고가 바로 성형을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이었다. 성형은 스승의 심부름을 갔다가 송시열의 집 앞에서 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개똥을 먹어야 할 위기에서 성형을 구해준다. 성형은 소년의 비범한 풍모에 이끌려 의형제를 맺게 된다. 알고 보니 소년은 장차 숙종이 될 세자. 소년이 왕위에 오른 뒤 성형은 왕의 부름을 받아 그를 지키는 최측근이 된다. 어린 왕은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을 각각 영수로 한 서인과 남인으로 나뉜 조정 신하들 사이에서 위태롭기만 하다. 성형은 궁궐 안팎을 오가며 주변 인물의 사람됨을 이르고 왕의 안위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뒤 숙종은 미모의 나인이었던 희빈 장씨에게 혹하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는다. 희빈 장씨 일가와 줄이 있던 남인들은 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반대파인 서인을 몰아낸다. 왕은 중전을 폐위하고 궐 밖으로 쫓아낸다. 희빈 장씨를 왕비로 세우자 백성들 사이에 이런 노래가 유행한다. “장다리는 한철이고 미나리는 사철일세/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닐으니/ 제철 가면 어이 놀거나.” 이 노래에서 장다리는 장희빈, 미나리는 폐비 민씨를 가리킨다. 백성들이 민씨를 동정했던 것이다. 문신 박태보는 왕에게 “전하께서는 사심에 따라 마음대로 행하시지만 인심과 하늘의 뜻을 억지로 어길 수 없다”며 민씨에 대한 폐비 조치를 거두라는 상소를 올린다. 왕은 격분하고 그를 참혹하게 고문하지만 박태보는 끝까지 자기 말을 거두지 않는다.

소설은 이렇게 백성들의 민심이 담긴 노래나 욕설, 신하들의 의로움이 담긴 상소나 글을 세세히 전한다. 나중에 민씨의 복위를 반대하던 남인은 실권하고 서인의 분파가 재집권한다. 왕의 변심과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장씨는 유폐된다. 그는 성형 앞에서 절규한다. “무죄한 여자의 없는 흠을 잡아 칠거지악이라 하여 막다른 곳으로 쫓아내기 일쑤이니 세상의 인심이 어찌 옳다 하겠습니까? 이는 여자의 잘못이 아니오. 사내라고 하는 족속은 은혜를 모르고 무작정 꿀을 탐하는 어리석은 벌과 같으니 어찌 하늘의 징벌을 면하리오”라고 한다. 자신이 여자에게 불리한 풍속과 남자의 변심에 희생됐다는 것이다. 희빈 장씨를 대개 악녀로 그렸던 과거의 이야기와 대조되는 부분이다. 성형은 강직한 선비 박태보의 인품을 흠모하고 김만중의 유유자적함을 존경하며 그를 찾아다닌다.

등장인물이 상당히 많고 역사서 인용이 잦기 때문에 다소 장황하고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숙종의 가계도를 펼쳐놓고 보면 한결 수월할 수 있다. 당파에 따라 관련 인물명을 메모하다 보면 조선 중기 역사까지 환해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성석제 특유의 능청스러운 해학이 곳곳에 곁들여진 데다 무술에 능한 주인공의 모험담이 흥미진진해 계속 읽게 된다.

기존 숙종 대 이야기가 지배자의 시선에서 왕을 둘러싼 치정이나 권력 쟁탈을 위한 당쟁에 초점을 뒀다면 이 소설은 범인의 시선으로 당대의 정세와 경제뿐만 아니라 세태와 풍속, 시정의 패설과 속요까지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결국 역사가 이 모든 것의 응축물이자 뭇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정치하게 드러낸다.

성석제는 말미에 수록된 작가의 말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거나 역사 그 자체가 된 익명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며 “악습을 무너뜨리고 불합리한 체제에 균열을 낸 그들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줬는데, 그 후손이 바로 현재의 우리다. 이 소설은 나 또는 우리 조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투명인간’ 이후 5년 만에 펴낸 성석제의 이번 소설은 역사에 드러나지 않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설정과 시대를 전방위로 조망한 내용 면에서 ‘21세기 사씨남정기’로 불려도 되지 않을까. 1995년 등단해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장편 ‘인간의 힘’ ‘위풍당당’ 등에서 재담꾼의 면모를 자랑해온 그는 이번에도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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