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디자인 입시 미술 학원에서 보조 강사로 일하는 대학생이다. 교실은 늘 연필 흑연 냄새와 물감 통에 붓을 빠는 소리로 가득하다. 학생들의 분위기를 살피고, 그림 시범을 보여주는 일이 내 역할이다.
학생들은 종종 켄트지 앞에서 망설이곤 한다. 쌤, 이 질감은 어떻게 칠해야 해요? 머뭇거리는 학생의 자리에 내가 대신 앉을 때면, 교실에는 작은 정적이 흐른다. 나는 붓을 들어 물감을 섞는다. 물감의 농도, 붓을 쥐는 힘, 그리고 내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그 모든 손으로 하는 과정을 학생들은 눈으로 따라 배운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전수가 아닌, 감각을 나누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이 교감의 영역에 낯선 존재가 끼어들었다. 이제 우리도 AI를 도입해보자. 선생님들이 시범 그리는 과정을 단계별로 찍어서 학습시키면, AI가 그 과정을 대신 보여줄 수 있을 거야.
원장님의 말은 학원가에서 유행하는 AI 기초디자인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여러 입시 학원들이 자체적으로 AI 모델을 가르쳐서 수업 자료나 홍보용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강사가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자료를 빠르게 얻을 수 있다는 효율성 이 그 이유였다.
내 역할은 그 학습에 들어갈 데이터 를 만드는 일이었다. 강의실 한쪽에 카메라를 두고, 나는 평소처럼 붓을 잡았다. 스케치 → 초벌 → 묘사 → 완성 의 네 단계를 이미지로 남기기 위해,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수년, 어쩌면 수십 년 동안 쌓아온 나만의 감각, 그날의 습도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손끝의 힘, 그 모든 사람의 감각 이 이제 데이터셋 이라는 디지털 언어로 번역되고 있었다. 나의 노하우가 이제 더 이상 온전히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아니, 값싼 복제물로 변할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이 불안감은 비단 서울의 작은 미술 학원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는 엑셀 매크로 하나로 자기 업무가 대체될까 두려워하는 직장인의 불안이자, 수십 년 쌓아온 장인의 기술이 하룻밤 새 기계로 바뀌는 것을 보는 모든 노동자의 불안과 맞닿아 있었다. 내 교실은 그렇게,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우리 시대 노동의 축소판이 되고 만 것이다.
내가 보여주는 시범이 AI의 데이터셋으로 들어가 버리면… 나는 대체 무엇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불안은 곧 호기심이 되었다. 나는 AI의 능력을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챗GPT에 기초 디자인 주제를 입력하고, 한국 입시 미술 스타일에 맞는 구도 다섯 가지를 요청했다. 체인이 유리병을 감싸며 장미가 포인트에 놓인 구도 같은 구체적인 제안이 몇 초 만에 쏟아져 나왔다.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시범작이나 합격작과 비슷했지만, 속도와 양에서는 사람이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다.
이어서 미드저니(Midjourney)에 프롬프트를 입력했다. 불과 5분 만에 완성도 높은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실제 시험장에서 나올 법한 구도, 깔끔한 붓 터치, 완벽한 질감 표현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나는 모니터를 보며 멍해졌다.
와, 학생들보다 잘 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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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2 Novembe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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