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15 Novemb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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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gye - 6 days ago

“자연결대로 아장아장 추는 춤에 논개의 충절 살아나죠” [나의 삶 나의 길]

#논개의 후예 그리고 진주검무의 전도사 마침 이날 오전에 진주교방 예술보급 및 경연대회가 열렸는데 초·중·고 학생으로 구성된 18개팀이 진주검무, 가야금, 전통춤 등 과거 진주교방에서 활발하게 공연되던 예술을 무대 위에 선보였다. 유네스코가 진주를 ‘공예-민속예술 창의도시’로 선정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다. 유네스코는 지난달 30일 전 세계 도시 중 2019년 창의도시 66곳을 발표했는데 한국에서는 진주와 원주(문학)가 추가로 선정됐다. 여기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진주검무다. 진주검무의 원형이 오늘날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논개 덕분. 1593년(선조 26년) 6월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돼 무려 7만명의 민관군이 숨지자 논개는 승전 파티를 벌이던 적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몸을 던졌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68년(고종 5년) 진주목사 정현석이 논개의 사당을 세우고 매년 6월 중 길일에 ‘의암별제’라는 제향을 올렸는데 지금은 진주 논개제로 이어지고 있다. 의암별제의 핵심이 논개에게 바치는 진주검무다. “진주검무는 논개가 속한 진주교방에서 활발하게 공연되던 매력적인 춤이죠. 교방에서 가무를 배우려면 검무부터 필수적으로 배워야 했으니 당연히 논개도 검무를 잘 추었겠죠.” 의암별제는 순종 때까지 매년 열리다 일제가 이를 없앴다. 사라질 뻔했던 의암별제를 되살린 것은 유 회장의 스승 성계옥 무원이다. “진주목사 정현석이 지은 교방가요에 4명의 기녀가 목이 꺾이지 않는 칼을 들고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요. 스승이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석사과정까지 다니면서 교방가요를 해석해 1995년 의암별제를 복원했죠. 복원 뒤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년 6월 논개제가 열리고 있고 2002년부터는 진주성 마당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음악, 춤, 노래가 어우러지는데 창관, 악관 등 제관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 매우 특이하죠. 그러니 의암별제를 보지 않고서는 논개를 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진주검무의 역사는 매우 깊다. 기록에 나온 것은 17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산 정약용이 논개의 사당 의기사 낙성식에서 진주검무를 보고 감동해 7언고시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을 남겼는데 ‘치고 찌르고 뛰고 굴러 소름이 쫙 끼친다’며 상세하게 묘사했다. “기녀가 천민이라 기록은 거의 없어요. 대신 구전으로 내려오는 재미나는 일화가 있죠. 순종 7세 탄신 잔치 때 각 목에서 선발된 기녀들이 궁중에서 장기자랑을 했는데 진주검무가 최고의 상을 받았다고 해요.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상이죠. 상으로 고관대작이 쓰던 옥으로 만든 노리개 옥관자와 비단을 받았는데 진주교방에서 대를 이어 자랑하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답니다.” #험난한 진주검무 생존의 길 검무가 조선 중기 궁중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 회장은 진주교방의 검무가 궁중에 유입되면서 활성화된 것으로 본다. “1904년 진주교방에서 궁중으로 뽑혀 올라간 마지막 선상기 최순이와 정약용의 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300∼400년 전부터 진주검무가 존재했고 선상기를 통해 궁중으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어요. 최순이는 한일합병 뒤 낙향해 진주검무는 물론, 고무, 향발, 아방무 등을 후배들에게 가르쳤답니다.” 진주검무는 진득진득한 보법이 특징이다. “진주검무는 왕족들 앞에서 공연하기 때문에 아주 어려운 춤이에요. 춤을 출 때 억지로 미소를 짓는다거나 멋지게 보이려고 몸을 비틀거나 엉덩이를 튕기거나 하면 안 되죠. 시선도 상대방 눈이 아니라 턱을 봐야 하고 발을 들 때 발바닥이나 속바지, 속치마가 보이지 않도록 정갈하게 움직여야 한답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진주검무가 살아남는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무형문화재 중 춤은 진주검무, 통영 승전무, 처용무 등 7개인데 이 중 진주검무가 1967년 가장 먼저 지정됐다. 하지만 일반에 보급하기는 쉽지 않았다. ‘기녀의 춤’이라는 부정적인 시각 탓이다. “스승이 무형문화재 지정을 계기로 진주검무를 적극 보급하려고 여고를 찾아갔죠. 그런데 난리가 난 거예요. ‘기생들이 왜 신성한 학교에 와서 학생들에게 춤을 가르치려 하느냐’고 학부모들이 엄청나게 반대했죠. 교사 자격증이 있던 스승이 1978년 9번째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겨우 검무 보급에 나설 수 있게 됐답니다.” 노래, 춤, 그림, 시문에 뛰어난 예기(藝妓)가 몸을 파는 창기(娼妓)로 이미지가 전락한 것은 일제 때문이다. 한일합병 이후 일제는 전국의 교방을 폐쇄하고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을 만들어 예능으로 몸을 팔고 술을 팔아서 먹고살도록 했다. “요즘 사람들은 기녀라는 단어에 큰 편견이 있어요. 조선시대 교방의 기녀들은 종합예술인이었답니다. 7∼8살 때쯤 교방 기녀가 되면 교방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까지 주면서 종합예술인으로 키웠어요. 예절교육에서 모든 춤을 하나하나 다 가르쳤답니다. 소리, 춤 , 연주를 모두 연마해 그중 재능을 보이는 분야로 진출하고 더 뛰어난 기녀는 시서화까지 했답니다.” #마흔이 넘어 시작한 진주검무 끼는 타고나나 보다. 유 회장은 어릴 때부터 공부는 싫어하고 노래와 춤을 좋아했다. 중학생 때 기타와 아코디언 연주에도 심취했다. 예술 DNA는 가야금 이수자로 진주 지방문화재인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여상을 나와 서라벌예술대학 무용과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는데 가족들에게는 가정과라고 속였단다. 당시만 해도 무용과 학생은 ‘딴따라’로 불렸고 국문과나 가정과를 나와야 시집을 잘 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때 대학의 최고 선생님들에게 배운 춤이 큰 자산이 됐답니다. 부채춤의 대가 김백봉 선생님에게 배웠고 한영숙 선생님에게는 태평무, 승무, 북가락까지 다 배웠죠. 졸업하고 나서 무용 좋아하는 사람들과 전 세계로 공연을 다녔고 서울의 큰 무대에서 공연도 많이 했죠. 그러다 어느날 부친과 친분이 있던 스승이 검무를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하더군요.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서울의 국립극장 등에서 공연하며 잘나가던 시절이었기에 지방에서 작은 규모로 공연되고 나이 많은 분들만 추는 진주검무가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진주검무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보통 한국무용은 방긋방긋 웃거나 기깔(멋)부리기에 치중하는데 진주검무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모든 동작을 자연결대로 움직인다는 점이 그를 사로잡았다. “나이 들어서 기깔부리는 춤은 맞지 않죠. 그런 춤은 젊을 때가 어울려요.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출 수 있는 유일한 춤이 진주검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진주검무는 아장하고 깨끗해 선이 고와요. 그러면서도 검무이기에 매서운 힘도 보여 주죠. 깍지떼기(활쏠 때 시위 놓는 동작)는 전통무용 중 진주검무에만 있답니다. 더구나 진주검무는 동작이 어려워 보급하기 힘든데 제대로 매뉴얼이 없었어요. 드디어 내가 평생 할 일을 찾은 거죠.” 유 회장은 마흔을 넘어서 진주검무를 시작했는데 쉽지 않았다. 선배들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다. 여기에 한국무용을 전공한 덕에 입문하자마자 두달 만에 무대에 오르니 선배들의 시기와 질투가 그에게 집중됐다. “선배들이 아무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진주검무는 매우 까다로운 춤인데 정확한 춤동작 방법이 정리되지 않은 탓도 있었죠. 15년을 먼저 한 선배도 그저 하나둘셋넷 하는 구령으로만 춤 연습을 해요. 이대로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진주검무를 추는 기본 순서만 익힌 뒤 성계옥 선생댁에 매일같이 찾아가 동작 하나하나를 모두 익혔죠.” 그는 이렇게 배운 춤을 동작별로 어떤 호흡과 손짓, 표정으로 연결해야 하는지를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꼼꼼하게 매뉴얼화했다. 논개제 때 보통 100명이 넘는 인원이 춤을 추는데 팀별로 가르친 뒤 행사 전날 한번만 리허설을 해도 칼같이 잘 맞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수자 국가지원 절실 현재 진주검무 이수자는 100명, 전수자 200명 정도다. 하지만 정부가 지원하는 국가문화재 전승금은 단체종목의 경우 135만원에 불과하다. “진주검무를 배우는 것은 무료지만 옷이나, 칼, 교통비 등은 모두 본인부담이에요. 국가에서 교통비라도 1인당 20만∼30만원 지급했으면 좋겠어요. 처우가 열악하니 이수자나 전수자 모집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요. 더구나 지방 대학교에는 점차 무용과가 없어지는 추세여서 걱정이 큽니다.” 유 회장은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서도 재능기부를 통한 봉사를 멈추지 않고 있다. 1년에 6∼7차례 한센인들이 머무는 소록도와 진주, 산청 성심원, 요양원 등을 찾아 공연하고 노래도 같이한다. 진주가 세계적인 민속예술 도시로 뻗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에 외국인들도 초대해 무료로 가르치고 있다. 또 조만간 이수자들이 자비로 필리핀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진주검무를 공연할 계획이다. 진주검무를 언제까지 출지 궁금했다. “아직 팔팔해요. 객지생활을 오래 해서 음식도 가리는 게 없을 정도랍니다. 글쎄요, 앞으로도 한 20년은 더 검무를 출 수 있지 않을까요. 호호호.” 진주=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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