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발끝에서 시작했다. 하늘은 유리알처럼 청명하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함을 전하는 계절, 자연이 잠시 숨을 고르며 만추(晩秋)의 화려한 색깔을 준비하는 고즈넉한 시간, 걷기 좋은 때다.
어딘가 떠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지난 25일 홀로 훌쩍 떠났다. 목적지는 전라남도 곡성군. 새벽녘 이슬 같은 비가 내렸다. 아침 공기는 구름 사이로 스미는 햇살에도 불구하고 제법 싸늘했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을의 서정. 그렇게 곡성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자연의 화음에, 꽃향기에 취하고
첫 여정은 침실습지. 섬진강과 곡성천·금천천·고달천이 만나는 203만㎡의 습지로, 섬진강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다. 일교차가 큰 봄가을 일출 무렵 물안개가 장관이라고 한다. 제22호 국가습지 보호구역이다. 습지는 조금 쓸쓸하게 고요한 얼굴로 담담하게 맞아 주었다. 날씨도 그렇거니와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새벽 강가를 뒤덮는 물안개의 몽환적인 풍경도 동이 트며 반짝이는 생선 비늘 같은 물결도 볼 수는 없었다.
강을 가로지르는 퐁퐁다리 위를 걸었다. 홍수가 져서 물이 세차게 흘러도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는 것은 다리에 구멍을 퐁퐁 뚫은 부력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모양새를 보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발 아래 강물이 흐르고 이마에 바람이 스친다.
은빛으로 부서지는 억새 군락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파도처럼 일렁인다.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 수풀 헤치며 흐르는 물 소리, 자연이 주는 화음에 귀 기울인다. 물안개라는 화려한 화장 대신, 억새와 물소리와 새소리라는 민낯을 드러내는 수묵화 같은 풍경이다. 이곳에서 가을은 깊어지고 있었다.
침실습지에서 곡성읍 방향으로 차로 10여 분. 풍경은 극적으로 반전했다. 방금까지 담백한 수묵화 속에 있었다면, 이곳은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유화 한가운데다. 동화정원, 삼만여 평의 야트막한 동산이 황화코스모스로 가득했다.
거대한 주황색 물감을 하늘 아래 쏟아부은 듯하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기 시작한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그 아래 펼쳐진 꽃의 바다는 아득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오직 세 가지뿐이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주황빛 꽃물결.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문득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가을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에 취해 한참을 넋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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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30 October 2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