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14 October 2025
ohmynews - 12 hours ago
명절을 거리에서 보낼 줄 누가 알았나요? 노점상의 눈물
저는 죽을 때까지 싸울 겁니다.
전국민주노점상연합 광진 성동지부 부지역장을 맡고 있는 박기용(가명, 60)씨가 내뱉은 말이다.
황금 연휴 끄트머리였던 지난 9일, 서울 건국대 입구 노점상 철거 현장을 찾았다. 마침 그날은 건대 앞 노점이 강제 철거를 당한 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다. 천막 농성장에서는 문화제가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이음나눔유니온도 연대하기로 결의를 모았다. 머릿수라도 보탤 마음으로 지하철을 탔다.
생계수단인 자신의 부스가 강제 철거되는 장면을 지켜본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부스는 하루의 생계를 책임지는 목숨줄이다. 거리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노점 마차를 점유형 박스로 바꾼 것이 10년 전이다. 박스로 바뀌기 전에는 하루의 장사를 위해 집 근처에 세워둔 마차를 끌고 장사를 하는 곳으로 갔다가 장사가 끝나면 다시 마차를 끌고 집 근처에 갖다 놓았다.
먹고살기 위해서 매일매일 마차를 끌고 다녔다. 이력이 날 만도 하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었다. 마차가 아니면 먹고살 만한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 일을 수십 년 동안 했다. 박기용씨가 이어서 말했다.
제가 노점을 한 지는 올해로 21년 됐어요. 닭꼬치를 팔았어요. 노점 부스를 철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에 달려왔어요. 부스를 못 가져가게 막으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어요. 용역들이 발로 누르고 힘이 세니까 당할 수가 없어요. 제 박스가 철거되고 제 몸에 쇠사슬을 걸었어요. 저를 잡아가려면 잡아 가라는 일종의 시위죠. 옛날에도 철거를 당할 뻔 했거든요. 그때는 6개월 동안 장사를 못하게 했어요. 생계가 너무 힘들었어요. 죽으려고 몸에다 휘발류 뿌리고 라이터에 불을 붙였는데 라이터가 안 켜져서 못 죽었어요.
이제는 마차를 집과 장사하는 곳으로 끌고 왔다 갔다 하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났다. 한시름 놓고 생계형 부스를 받아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진구청은 지난 9월 8일 새벽, 건장한 용역 250명을 동원하고 포클레인을 이용해 부스를 떴다(노점 부스를 포클레인으로 철거하는 것을 상인들은 뜬다 고 표현한다 - 기자 주).
자신의 목숨과 같은 부스를 포클레인으로 뜨는 걸 지켜보는 당사자의 심정은 어떨까. 가슴이 찢어진다 는 표현 말고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다. 벼랑 끝에 내몰렸다 는 것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쓰는 말이다.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필이면 장사가 제일 안 되는 계절(여름)에 부스가 철거되어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 는 박기용씨는 아들 하나를 홀로 키웠다. 자신은 온갖 고생을 다 해도 아들만 건강하게 자라준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다행히 아들은 건강하게 잘 커서 무사히 군생활을 마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단다. 그는 건국대 앞에서 노점을 하기 전에도 남대문과 동대문에서 마차를 폈다 접었다 하면서 노점을 했다.
구청은 노점상하는 저희를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쓰레기 보듯 해요.
쓰레기 라는 단어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사람이 쓰레기 처럼 보일 때는 어떤 때일까. 먹고살기 위해 길거리에서 노점을 한 것이 죄라고 치자, 그렇다고 더럽고 냄새나고 버려야 하는 존재는 아니지 않은가. 노점은 가장 오래된 직업이고 도시의 거리 문화를 정착시킨 대표적인 행위다. 천막 농성장에는 건국대 학생들이 손으로 쓴 피켓이 붙어 있었다. 피켓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중간고사 끝나면 놀러 와서 분식 먹고, 어버이날에 꽃 사 가던 우리의 일상이 왜 치워져야 하나?
농성 천막 안쪽에는 간이 주방이 있다. 전쟁같은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식사 때문이다. 간이주방에 상인 한 분이 들어 오셨고 잠시 대화를 할 수 있냐 고 물었다. 흔쾌히 응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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