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살이 반백 년에 이르지만, 여전히 한국어로만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재일 소설가 김길호 작가다. 꼭 일본어에 한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외국에 건너가 처음 몇 해는 언어의 부적응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10년, 20년, 50년... 세월이 흐르면 모국어보다는 현지어가 먼저 튀어나오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쯤 되면 현지어가 모국어 보다 우선될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김길호 작가의 일본어는 한국어를 뛰어넘는 언어일 텐데 왜, 무슨 까닭으로 그는 한국어 글쓰기를 고집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들을 기회가 지난 9월 26일 부산 동의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이경규 소장) 주최의 제24회 국제학술대회 재일한인 연구 10년, 연구 성과에 대한 회고와 성찰 , 아래 동의대 재일한인 연구 학술대회 였다. 평소 소식을 주고받던 김 작가로부터 동의대 재일한인 연구 학술대회 소식을 들은 것은 행사 1주 전쯤이었다.
그러나 학술대회 기간인 9월 26일과 27일 이틀 동안은 개인적인 일로 학술대회장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김 작가는 학술대회를 마치고 나서 진행된 학술대회에서의 상세한 내용을 글로 보내왔다. 그 가운데 자신이 한국어로 작품을 쓰고 있는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필자(김길호 작가)의 일본살이는 1973년 군대에서 제대해서 왔으니까 52년째다. 그동안 계속 한국어로 소설과 여러 칼럼도 쓰고 lt;제주경제일보 gt; 인터넷신문에 김길호의 일본아리랑 을 연재(현재 186회)하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는 필자 이외에 한, 두 사람이 있을까 말까다. 시인으로는 도쿄에 사는 왕수영 선생이 계시다. 현재 일본에 살고있는 한국 국적 동포는 약 40만 9,000명이고 조선 국적이 약 2만 3,000명이다. 재일동포는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일본에 뿌린 내린 세대가 거의 전부여서, 필자처럼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글 세대들은 (물론 뉴커머라는 신 1세가 불어나고 있지만) 소수다. 그래서 혹시 질문이라도 있을까 해서 이번 발표를 위해 필자의 저서 세 권과 기사 등등 5kg 가까운 자료들을 가지고 갔다.
김길호 작가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 한 사람 아니, 문인 한 사람도 없다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한글세대가 없는 재일동포 사회라지만 한국 국적, 조선 국적 합하면 모두 43만 명이 넘는데 문학으로 우리말을 지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이건 부조리 속의 부조리다. 그래서 필자는 문학 이전에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 한국어로 소설을 계속 쓰고 있다.
김길호 작가가 우리말로 소설을 쓰고 있는 가장 적확한 이유를 들려주었을 때 나는 문득 매천 황현(黃玹.1855~1910) 선생이 떠올랐다. 대한제국 말기 우국지사였던 선생은 1910년 한일병탄으로 500년 사직을 일제에 송두리째 빼앗기던 날,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할 때 누구 하나 책임감 있는 행동을 안 한다면 그것 역시 치욕이다 라고 말하면서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로 생을 마감했던 분이다.
물론 김길호 작가의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 한 사람 아니, 문인 한 사람도 없다면 말이 안 된다 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말 글쓰기 를 고집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완전히 동의하지만, 혹시 이 바탕에는 문단 선배들의 충고 말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기자는 지난해 4월 12일, 평생 한국어연구에 몰두한 재일동포 김예곤(金禮坤, 91) 선생을 취재하기 위해 오사카를 방문했는데 그때 김길호 작가와 대동한 적이 있다. 연로하신 김예곤 선생의 효고현 다카라츠카시(兵庫縣 宝塚市) 자택까지 안내했던 김길호 작가를 귀국 전에 오사카에 있는 동포가 운영하는 감자탕집 경애관(京愛館)에서 만났을 때 김 작가가 한 이야기를 기자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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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12 Octobe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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