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예찬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걸음으로써 다른 리듬 속에 몸담고 시간·공간·타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걷기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회복하고, 자신의 저력에 대한 믿음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스스로 탈핵 비움 실천가 라 소개하는 청명은 이 걷기 라는 가장 소박하지만 가장 저력 있는 방법으로 세상을 만난다. 2016년부터 탈핵 메시지를 담은 몸자보를 두르고 방방곡곡 누비는 활동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청명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사계절 옷이며 생필품을 모두 담은 36리터 배낭이 살림의 전부지만, 그의 삶은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보부상의 요술 보따리 같다. 지난 여름, 전북 남원시 산내에서 청명을 만나 그의 삶과 실천, 바람을 들었다.
별빛 같은 어린 시절
원래 고향은 충북 괴산이에요. 괴산군 청안면 효근리, 거기서도 외딴 저 꼭대기로 올라가야 되는 그런 집에서 살았어요. 어려운 환경이었었죠.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때 호롱불을 켜고 살았지만, 가난하다는 체감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창틈으로 쏟아지는 별빛, 밭에 나가 담배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농사를 기록하는 심부름, 누에 옆에 자면서 누에 크는 것을 관찰하던 것, 공책과 연필을 받으려고 달리기 1등을 놓치지 않던 일, 학교 마치면 집에 돌아와 풀 베고 소죽을 끓여 먹이던 일상은 더없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다.
불빛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런 어둠에 수없이 쏟아지는 별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조그만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그 별빛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때로는 듬성듬성 구름이 가는 길에 껴주듯이 뜬 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너무 많아서 이 별이 어둠을 막 몰아내는 것 같더라고요. 그 별을 바라본 기억을 잊을 수 없어요. … 힘들었던 것도 견딘 것보다는 사실 제게 좋은 추억이었죠.
중학생 청명은 학교에서 빌려주는 lt;쿼바디스 gt;, lt;노인과 바다 gt;, lt;폭풍의 언덕 gt; 같은 고전에 푹 빠졌다. 교과서가 아닌 책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 찬 시절을 보냈다. 집에서는 날마다 농사와 집안일 심부름하느라 책볼 짬도 나지 않았기에, 학교만 가면 열심히 책을 파고들었다.
공순이가 아니라 장.미.영!
청명은 농부를 꿈꿨지만, 엄마는 엄마처럼 살지 말고, 도시로 나가 돈을 벌라 며 말렸다. 결국 청주에 있는 산업체 고등학교인 양백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70~1980년대에는 주로 방직공장 내에 산업체 부설학교 라는 것이 활발히 설립됐다. 육성회비 같은 것이 없어 돈 걱정을 덜 수 있고, 고등학교 학력도 따면서 공장 근무를 통해 돈을 벌 수도 있었다.
학교는 안 보내준다고 하는데 그러면 산업체 학교라도 가자 싶었죠. 집에서 나가 살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누군지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날 장미영이라고 안 하고 공순이 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부른 애들은 대부분 대학생 남성이었어요. 남성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산업체로 와서 바로 주임을 따요. 여성들은 흔히 대학을 가던 시절이 아니니까, 여성 노동자들을 공순이 라고 막 부르는 거죠. 그전에는 제 이름이 소중한 줄 몰랐는데, 공순이라 부르지 말라고 엄청나게 싸웠어요.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하루 8시간을 근무하고, 수시로 4시간 가까이 잔업을 해야 했다. 때로는 학교 가는 시간을 빼서 잔업을 하기도 했다. 부푼 꿈을 안고 들어간 학교에서 하고 싶었던 공부는커녕, 밤낮으로 생산량에 매달려야 하는 생활이 너무 갑갑했다.
1학년 때 첫 달은 제가 월급으로 받은 돈도 찢어버렸어요. 돈이 되게 귀한 시기였잖아요. 근데도 그런 구조와 생활이 너무 싫어서 돈을 다 찢어버리고 박차고 나갔어요.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이 돈 때문에 내가 학교에 왔구나 싶었어요. 박차고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어 또 돌아갔죠. 다음 날 출근을 했더니, 반장 언니가 제가 찢은 돈을 다 붙여놨다 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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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18 October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