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사건이 유난히 많았던 1950~60년대에 적발된 간첩 혐의자 중에는 대학 학력자가 많았다. 국가정보원이 2007년에 펴낸 과거사 보고서인 lt;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gt; 제6권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69년까지 적발된 혐의자 3369명 가운데 학력이 확인된 사람은 2515명이다. 이 중에서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중퇴했거나 졸업한 사람은 12.2%인 308명이다.
국가데이터처(통계청)의 e-나라지표 가 한국교육개발원의 lt;교육통계분석자료집 gt; 등을 근거로 제시한 통계에 따르면, 1980년에 고등교육기관 취학률은 대학 입학이 가능한 적령인구 중의 11.4%였다. 위 통계와 이 통계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1960년대까지의 간첩 혐의자 중에 대학 학력자가 많았다는 점은 그로부터 10~20년이 지난 1980년의 취학률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위의 2515명 중에 대학원 학력자는 전혀 없었다. 위 국정원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원을 다녀본 사람이 간첩 혐의자로 입건된 것은 1971년 이후다. 이해에 적발된 127명 중에서 학력이 확인된 사람은 74명이고, 그중 5명이 대학원을 졸업한 석사 이상이었다.
1973년 5월 28일경 서울시 영등포구 화곡동(1977년부터 강서구)에서 체포된 재일교포 최창일도 대학원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1974년 6월 3일 자 서울고등법원 판결문은 1941년 일본에서 출생한 그가 히로시마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한 뒤 도쿄대학 자원개발공학과 석사과정을 이수했다고 알려준다.
최창일은 체포 2개월 전부터 서울대 자원공학과 시간강사를 겸했다. 1967년 3월경 함태탄광 도쿄지점에 입사한 그는 그해 10월 무렵부터 서울 본사에서 일하다가 1973년 3월에 서울대 강사로 임용됐다. 1960년대에 대학원을 나온 사람이 연고도 별로 없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데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당시 일본 사회의 극심했던 한국인 차별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트렌드에 부합하는 희생양으로 선택
그가 검거된 1973년에는 간첩으로 적발된 64명 중에서 학력이 확인된 39명 가운데 9명(23.1%)이 대학원 졸업자였다. 그는 간첩 혐의자들의 학력이 높아지기 시작하는 추세 속에서 검거됐다. 그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비교적 새로운 유형의 간첩 혐의자였다. 남파간첩(직파간첩)이나 고정간첩이 아닌 우회간첩의 혐의가 그에게 주어졌다.
종래의 간첩 혐의자들은 주로 남파간첩 혐의를 받았다. 휴전선이나 한반도 해상을 통해 파견됐다고 알려진 간첩 혐의자는 1951년부터 1969년까지 2802명이었다. 그다음은 남한 내에 생활기반을 갖고 활동하는 395명의 고정간첩 혐의자다.
이 기간에 일본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파견됐다고 알려진 혐의자는 90명이다. 남파간첩·고정간첩과 이 같은 일본우회간첩 외에도, 제3국을 우회해 한국에 들어오는 간첩, 남북어부였다가 북의 밀명을 받고 송환된 간첩 등등의 유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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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18 October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