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t;아이언 크로우즈 gt;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방글라데시 치타공 해변, 오대양을 누비던 거대한 배들의 종착역이다. 모래사장에 수만 톤이 넘는 거대한 선박들이 닿으면 2만여 노동자들이 개미 떼처럼 달라붙는다. 안전장비 같은 건 그들에게 사치다. 수백 톤 쇳덩어리가 해체 과정에서 수시로 작업자 사이에 떨어지지만, 노동자들은 숙명인 양 묵묵히 작업에 매진할 뿐이다.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섭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곧 그들의 일상을 조명하고, 왜 그들이 한 달에 몇십 명씩 재해로 죽는 가운데에도 위험한 작업에 매달리는지 관객에게 해설한다. 보고 나면 한동안 아득하게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던 영화는 놀랍게도 한국 감독 작업이라 했다. 다큐멘터리 전문 영화제 중 세계적으로 첫 손 꼽히는 암스테르담 국제다큐영화제(IDFA)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박봉남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lt;아이언 크로우즈 gt;의 경이 이후 후속작은 도통 소식이 없었다. 10여 년이 지났다. 문득 누군가 1980년 사북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작업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국 현대사에서 철저히 지워진, 그러나 개발독재 치하에서 벌어진 노동 탄압과 그에 반발한 아래로부터의 봉기란 측면에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바로 그 사건이다.
아직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파헤칠수록 한국 사회 충격적 모순이 드러날 해당 사건은 다큐멘터리 작가라면 누구나 도전하고 싶지만, 주화입마 위험 다분한 숙제다. 함부로 덤비기 쉽잖은 사건을 다룬다니 기대 반, 걱정 반. 역시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다림의 끝에 마침표를 찍으며 등장한 영화는 역시 lt;아이언 크로우즈 gt; 감독의 후속작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렇게 lt; 1980 사북 gt;과 만났다.
[1부] 1980년 4월, 강원도 탄광촌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나?
화면이 밝아온다. 온 세상이 하얗다. 마치 감춰진 비밀의 왕국처럼 끝없이 이어진 가느다란 철길과 터널로 카메라가 향한다. 눈 덮인 겨울 속 쇠락한 소도시와 마을의 풍경이 펼쳐진다.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지방 소멸 공동화 현상의 전형으로 보이던 동네엔 다른 지역과 뭔가 좀 다른 특이점이 있다. 철 지난 경제개발 구호가 떠오르는 문구와 조형물, 그리고 광부들의 형상이다. 동네 곳곳에 과거 이 지역이 탄광이었음을 떠올리는 흔적이 즐비하다. 그리고 탄광이 사라진 도시에 보상 조치로 개설된 카지노가 나타난다.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셈이다.
과거의 기억은 공식적으론 이렇다. 잘살아보세! 외치며 국가 주도하에 전 사회가 병영화-군사화로 달리던 시대, 이곳의 광부들은 자원이랄 게 없는 작은 나라에서 그나마 풍부하던 석탄 채굴로 경제 성장과 겨울 난방을 책임져 왔다. 그들은 산업전사 로 불렸고, 과거 세대가 분투해 오늘날의 번영을 이룩하는 데 일조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교과서에 수록된 공식 역사다.
하지만 전성기에 강원도 곳곳에 소재한 개별 광산마다 수백 수천 명의 광부가 위험한 작업을 거듭하며 매년 200명씩 죽어 나갈 때도 노동자들은 목숨 건 노동의 성과를 제대로 분배받지 못했다. 정선 지역 최대 규모이던 동원 탄광엔 3000명 넘는 이들이 일했고, 그들의 가족이 몰려 산중에 거대한 마을이 생길 정도였지만, 마을 전체에 가게는 단 한 곳뿐, 바가지 가격에 심지어 그들이 캔 원료로 만든 연탄조차 시중가보다 비쌌다. 안전대책도, 사원복지도 말뿐인 상황에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할 책임을 진 노조 집행부마저 어용이니, 합리적 개선책은 전무했다. 그 결과가 1980년 4월 21일, 어용 노조에 분노한 광부들의 우발적 봉기로 터졌다.
한 번 발화하자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회사와 결탁한 경찰에 분개한 노동자들은 파출소를 박살내고 도주한 노조 지부장 대신 그의 아내를 기둥에 매달았다. 분노는 해일처럼 몰아쳤고, 다음날 졸속 진압을 도모하던 공권력은 안경다리 에서 벌어진 투석전에서 인명피해만 낳고 도주한다. 곧이어 공수부대 진압 계획이 나돌고 일촉즉발의 유혈사태 위기가 닥친다. 도지사의 주도로 노사정 협상이 이뤄져 4일 만에 일정한 요구안이 합의되고 최악의 상황을 염려하던 사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습된다. 광부들은 현장으로 복귀한다. 여기까지가 공식 적인 사북 사건의 전말이다.
[2부] 군부정권의 엄혹한 탄압, 또 하나의 오월 광주
여기까지만 보면 끓어오르듯 분출하던 광산노동자의 분노에 비해 원만하게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며칠간 광부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요구, 민주적인 노조 개편과 면책 조치가 받아들여진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 먼 남쪽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둠이 깃들 때마다 흉흉한 소문이 닥친다. 오늘은 누구네 집에 군화발로 들이닥쳐 불문곡직 끌려갔다는 것이다. 마구잡이로 연행된 광부와 가족들은 가혹한 고문과 조작된 사건 연루에 놓였다.
카메라는 40여 년 뒤 생존자들이 떨리는 음성과 함께 자신의 부서진 육체로 증언하는 가공할 폭력의 실체로 다가선다. 화면에서 시선을 돌리고 싶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공수부대에서 직업군인으로 10년간 복무한 건장한 광부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앙상한 모습으로 진술할 때는 어떻게 고문하면 사람이 저렇게 되나 싶을 지경이다. 광부의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여성들도 무자비한 폭력과 모욕에 시달렸음이 밝혀진다. 여전히 국가의 공식 사과가 이뤄지지 않은 사북 사건의 진상 규명과 진정성 있는 사죄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에서 한이 천업이 쌓인 이만이 내뱉을 수 있는 기운이 여과없이 스며온다.
짜맞추기 식 용공조작은 물론, 독재정권의 단골 메뉴인 배후조직 실체를 대라는 협박으로 피폐해진 사건 참여자들은 징역살이 이후에도 온전히 삶을 회복하지 못하고 대부분 광산을 떠나 흩어졌다. 감시가 따라붙고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들의 망가진 인생을 우직하게 좇는 카메라의 집념은 곧 영화 속 화자인 황인욱 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의 그것일 테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하지만 정작 본인은 격동의 4일간 주변부에 머물었던 기억을 마치 원죄처럼 여기며 부당하게 매도된 사북 사건의 진실을 반드시 세상에 제대로 알리리라 다짐한다. 그의 끈기와 각오가 곧 꺼지지 않는 엔진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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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29 Octobe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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