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간의 역사적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 형성에 기여했다. 3·1운동과 8·15 해방은 항일투쟁을 했거나 지지한 사람들의 가치관을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관으로 정착시켰다. 홍범도나 김구 등이 영웅으로 부각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편 사람들이 명분도 없이 부와 권력을 거의 독차지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친일청산이 과제로 남아 있다.
4·19혁명과 6월항쟁은 민주화 투쟁을 했거나 지지한 사람들의 가치관에 보편성을 부여했다. 이 투쟁을 통해 부각된 김대중·김영삼은 대통령이 됐고, 그 외 사람들은 새천년 들어 정치권 주류세력이 됐다. 그러나 반대편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여전히 점유한 채 사회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2016년에는 촛불혁명이 타오르고, 8년 뒤에는 빛의 혁명이 발사됐다.
인민군의 진격 막아내고, 대한민국을 구하다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가치관이 그 뒤 오랫동안 보편적 가치관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런 속에서 백선엽이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됐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군인은 독립투사 김홍일(1898~1980)이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lt;독립유공자공훈록 gt; 제5권 김홍일 편은 황해도 경신학교 교사였던 그가 1919년 3·1운동 이전에 학생비밀결사사건 때문에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1921년 이후에 독립군단체인 대한의용군사회를 거쳐 중국 국민혁명군에 들어가 사단 참모 등을 역임했다고 기술한다.
김홍일은 중국 군관학교 교관 시절인 1937년에는 한인 학생 100여 명을 훈련시켜 이들을 조선의용대로 편성하여 항일투쟁에 참여 시키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참모장이 되어 국내상륙작전을 준비했다. 이처럼 3·1운동 이후부터 전쟁 무대를 누빈 김홍일의 관록이 투영된 무대가 1950년 6·25전쟁이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인민군의 진격으로 인해 대한민국 영토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났다.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것은 8월 1일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그처럼 빨랐다.
인민군이 부산을 점령했다면, 유엔군은 한국이라는 성곽 밖에서 공격을 해야 했다. 이렇게 됐다면 미군이 성 안의 인민군을 제압하기가 곤란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유엔군이 일본 등에 진을 쳐야 하므로 전쟁의 범위와 파급력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산은 함락되지 않았다. 유엔군이 전열을 갖출 때까지 인민군의 진격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의 향방을 갈랐다. 이는 김홍일이 인민군의 발목을 한강 이북에 묶어놓은 직접적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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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1 Novembe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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