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13 Octobe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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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 9 hours ago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 27] 베트남파병 관련 논쟁


베트남은 우리와 역사적으로 닮은 데가 많고 정서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이다. 고대에는 세 번에 걸친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했고, 한때 중국에 병합되었으나 독립을 회복하고, 17~18세기 시대에 남북으로 분단하여 서로 싸웠다. 19세기에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보호국이 되었다가 맹렬한 반불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2차 세계대전 후에는 1945년 최후의 황제 바오다이를 퇴위시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1950년 제네바 협정에 의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져 분단이 되어 싸우고, 1976년 7월 통일을 이루어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베트남에서 내전이 일어난 것은 1955년(제네바협정 성립 이듬해) 남부베트남에서는 바오타이가 퇴위하고, 고 딘 디엠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를 강력히 지원한 미국은 협정에 따른 베트남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반대했다. 이에 따라 남부베트남에 강력한 반정부세력이 대두했고 1960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성립하여 본격적인 내전상태로 들어갔다.

미국은 남베트남군사정부를 지원하고 민족해방전선을 압박하기 위해서 베트남에 군사 개입을 시작했다. 1963년 고딘 디엠 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미군의 개입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엄청난 전비와 완강한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반격으로 점차 수렁에 빠져 들고 있었다.

1961년 5월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그의 과거 행적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해 11월 11일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한다면 한국 정부는 월남(베트남)에 부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고 정규군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지원군을 모집할 수도 있습니다. 라고 제안했다. 미국의 파병 요청이 있기 전에 자진해서 제안한 것이다.

미국의 오랜 맹방인 영국이나 캐나다를 비롯 어느 나라도 파병을 거부하면서 미국이 외롭게 베트남 전쟁을 치루고 있을 때 박정희의 파병제안은 그야말로 구원투수격이었다.

박정희의 파병 제안은 국무회의나 국회의 의결(당시 국회는 해산상태)이 따르지 않았다. 베트남의 역사와 세계사적인 이 전쟁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파병문제는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부는 64년 7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베트남공화국 지원을 위한 국군부대의 해외파병 동의안 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이때는 의료지원 등 비전투부대 파병안이다. 그러나 전투부대의 파병안은 65년 8월 13일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공화당 단독으로 처리하였다.

한국군이 처음으로 베트남전에 투입된 것은 63년 9월 11일, 남부 베트남정부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이때는 불과 130명 규모의 의무부대와 10명의 태권도 교관이 전부였다. 그후 다시 지원요청을 받아 64년 2월 14일 2천 명 규모의 비전투부대인 공병대 중심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이때만 해도 국내외적으로 크게 말썽이 없었다.

2천 명 규모의 국군병력을 파병하기 위해 정부에서 제출한 동의안은 국회에서 무난히 통과되었다. 그러나 65년 6월 26일 베트남과 미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전투부대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일반국민과 학생들 사이에도 반대의견이 적지 않았고, 국회 내에서는 여야의 입장을 초월해 반대의견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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