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을 빙자한 12·3 내란 때 반국가세력 체포조가 있었으며 이 무렵에 군이 시신가방 3천 개와 종이 관 1천 개를 구입했다는 보도는 우리 사회를 놀라게 만들었다.
국가비상사태를 빙자해 야권이나 반정부세력을 체포하거나 학살하는 일은 일제강점기에도 있었고 이승만 때도 있었다. 5·18 광주 학살 직전인 1980년 5·17 쿠데타(비상계엄 확대조치) 때도 마찬가지다.
범법 혐의가 없는데도 국가안보나 질서유지를 빌미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이거나 죽이는 일들은 그런 시절에 많이 자행됐다. 윤석열 정권과 극우세력이 친일을 옹호하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찬미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한 일이었다.
반국가세력에 대한 사전 검거 혹은 예비검속의 빌미가 되는 국가비상사태가 일반 소요가 아닌 전쟁일 경우에는 인명살상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다. 그래서 한국전쟁 때의 참극은 훨씬 비참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펴낸 lt;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gt;의 일환인 군위·경주·대구 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편은 1950년 한국전쟁(6·25전쟁) 발발 직후에 경상북도 남부에서 자행된 만행을 열거한다. 항일투쟁이나 진보운동에 참여한 전력으로 인해 국민보도연맹원 등으로 분류됐다가 전쟁 초반에 희생된 사람들의 규모가 군위 100여 명, 경주 최소 280여 명, 대구 1000여 명 정도로 추산 된다고 기술한다.
그때 대구 1000여 명 에 포함될 뻔했다가 살아남은 의사가 있다. 대구 남산동에 거주하면서 병원을 운영하던 37세의 이원식이 바로 그다. 위 글에 따르면, 1913년생인 그는 국민보도연맹 경상북도지부 회원이었다.
이원식은 일제 때의 항일운동가다. 그는 저명한 항일투사이자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운동가이며 대구 지역 교사인 현준혁(1906~1945)을 따랐던 학생운동가다.
군경이 부인을 끌고 간 뒤 학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lt;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gt;에 실린 이원식의 항일독립운동의 건 은 이원식은 재학 중이던 1930.8 현준혁의 지도하에 한글보급운동에 참여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 비합법 비밀결사조직 기관지 등의 문건 배포 활동을 담당한 개연성이 있다 고 설명한다. 이는 그가 이승만 정권하에서 보도연맹에 편입된 배경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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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28 October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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