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소환된 헌법
대한민국 헌법 제12조.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 구속, 압수, 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한다.
지난 10월 29일, 서울동부지법 재판정. 검사는 구형에 앞서 또박또박, 그리고 크게 헌법을 낭독했다. 그 목소리는 법정 안의 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방청석 곳곳에서 숨죽인 듯한 정적을 깨는 흐느낌 소리가 하나 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단순한 헌법조항이 지켜지지 않았던 시대, 국가가 법을 앞세워 인간의 존엄을 짓밟았던 그 시절의 희생자, 그 이름이 강을성이었다.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에서 통일혁명당 재건위 사건 으로 불린 이 사건은, 군사정권이 조작한 대표적인 간첩단 사건 중 하나였다.
강을성씨는 그 조직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보안사령부에서의 강압·고문 끝에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 그의 재판은 민주주의의 사각지대 군사법정에서 진행됐다.
1976년, 그는 사형이 집행되었고 돌아올 수 없는 주검이 되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길 바랐던 가족은, 작은 나무 상자에 흰 가루로 돌아온 그의 유골을 망연자실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남긴 유언은 기록되지 못했고, 사망하던 그 순간을 가족들은 함께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50년 뒤, 그 이름이 다시 법정에 불렸다. 이번에는 피고인 이 아니라 억울한 희생자 로서였다.
그날, 검사가 낭독한 헌법 제12조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세대가 뒤늦게야 되찾은 국가의 약속 그리고 사라졌던 정의가 다시 소환된 순간이었다.
[관련기사] 사형 50년 만에... 무죄 구형하고 고개 숙인 검사 (https://omn.kr/2fu6j)
사라진 기록, 멈춘 정의
강을성씨의 재심이 이토록 오래 걸린 이유는 단순한 행정적 지연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군인 신분이었다. 보안사령부가 주도한 군사재판에서 간첩 으로 선고받았고, 그 재판의 모든 기록은 군 내부로 흩어져 보관됐다. 오래된 기록의 행방을 찾는데 법원도, 검찰도, 국방부도 서로 책임을 떠넘겼다. 결국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는 말이 재심의 순조로운 진행을 가로막는 벽이 되었다.
변호인과 유족들은 강을성씨의 기록을 찾아 헤매야 했다. 재판 과정에서도 함께 재판을 받았던 박기래, 진두현 등의 재판 기록을 직접 찾아 복사해 제출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을 겪었다. 수사, 재판의 기록은 국가가 담당하는데도 그 기록을 찾고 복사해 제출하는 모든 과정은 결국 피해자 측이 담당해야 하는 불합리가 재판 과정에서 반복됐다.
과거 군사재판은 철저히 폐쇄적이었다. 기록은 군의 기밀 로 분류되었고, 심지어 재판장조차 상부의 명령 없이 기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 이러한 구조는 이후 진상규명 과정에서 국가폭력의 재생산 장치 로 지목되었다. 실제 1980년대까지 이어진 수많은 군 관련 간첩사건들이 모두 유사한 패턴으로, 조작·기록 은폐·사형 집행의 과정을 밟았다.
강을성 사건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기록의 부재는 곧 진실의 부재였고, 국가는 증거 없음 을 이유로 재심을 미뤘다. 그 공백의 시간 동안, 유족들은 국가의 침묵 과 싸워야 했다. 다행히 변호인과 유족의 노력으로 강을성씨의 수사기록 일부와 군사법정 명부가 확인되면서 재심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전체 내용보기
Saturday 1 November 2025
⁞
